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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콘드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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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릴 콘드라신은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소련 출신의 지휘자이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볼쇼이 극장과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며 명성을 얻었다. 특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하고 초연했으며, 반 클라이번과의 협연으로도 유명하다. 1978년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981년 급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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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콘드라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키릴 페트로비치 콘드라신
원어 이름Кирилл Петрович Кондрашин (러시아어)
출생일1914년 3월 6일
출생지모스크바
사망일1981년 3월 7일 (향년 67세)
사망지암스테르담
직업지휘자
1979년의 키릴 콘드라신
키릴 콘드라신 (1979년 2월 28일 촬영)
경력
활동 기간1943년 - 1981년
음악 스타일
장르클래식 음악
관련 인물

2. 생애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연주자로 활동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1931년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를 배웠고, 1934년 졸업 후에는 모스크바 음악 극장의 부지휘자와 레닌그라드 말리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중에는 도시 방어선 구축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3년 스승 하이킨의 추천으로 볼쇼이 극장 지휘자가 되어 오페라와 발레 지휘 경험을 쌓았다.

1949년 소련 청소년 교향악단 지휘자로 체코, 헝가리, 폴란드 음악제에 초청되어 첫 해외 공연을 가졌고, 이후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 유명 독주자들과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다.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쿨 결선 협연 지휘를 맡아, 피아노 부문 1위 입상자 밴 클라이번과 미국 순회 공연 및 음반 녹음을 진행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1]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어 악단 기량 향상과 단원 처우 개선에 힘썼으며, 말러쇼스타코비치 교향곡 등 대규모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과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초연은 소련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 1975년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완료하여 세계 최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멜로디야에서 출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단 운영 및 관리를 둘러싸고 당국과 잦은 의견 대립을 겪다가 1975년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78년, 암스테르담에서 암스테르담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하던 중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콘서트허바우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등과도 연주회를 가졌다. 1981년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대역으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암스테르담 공연을 지휘한 직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지휘 활동 외에도 후진 양성을 위한 세미나와 마스터클래스를 활발히 진행했으며, 소련에서는 지휘법 교본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분석집 등 이론 서적을 집필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4년 모스크바에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어릴 적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고, 1931년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를 배웠다.[1] 1934년 졸업 후 모스크바 음악극장의 부지휘자와 레닌그라드 말리 극장의 지휘자를 차례로 역임했다.[1]

2. 2. 경력

1934년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졸업 후 모스크바 음악극장의 부지휘자와 레닌그라드 말리 극장의 지휘자를 차례로 역임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에는 도시 방어선 구축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3년 스승 보리스 하이킨의 추천으로 볼쇼이 극장 지휘자가 되어 오페라와 발레 지휘 경험을 쌓았다.

1949년 소련 청소년 교향악단 지휘자 자격으로 체코, 헝가리, 폴란드 음악제에 초청되어 첫 해외 공연을 가졌고,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닐 샤프란 등 유명 독주자들과 자주 협연하며 유명해졌다.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쿨 결선 협연 지휘자로 출연, 피아노 부문 1위 입상자 밴 클라이번과 미국 순회 공연 및 음반 녹음을 진행해 화제가 되었다.[1] 이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3번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녹음했으며, 특히 차이콥스키 음반은 100만 장 이상 판매된 최초의 클래식 LP였다.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어 악단 기량 향상과 단원 처우 개선에 힘썼고, 말러쇼스타코비치 교향곡 등 대곡들을 주로 다루었다.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발표를 미뤄왔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과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집을 가사로 한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초연은 소련 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 1975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완료해 세계 최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멜로디야에서 출반했다. 악단 운영 및 관리를 둘러싸고 당국과 잦은 의견 대립 끝에 1975년 음악 감독직에서 퇴진했다.

1978년 암스테르담에서 암스테르담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하던 중 망명했다. 이후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콘서트허바우 수석 객원 지휘자로 주로 활동했고,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등과도 연주회를 가졌다. 1981년 클라우스 텐슈테트 대역으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암스테르담 공연을 지휘한 직후 심장 발작으로 타계했다.

지휘 외에 후진 양성을 위한 세미나, 마스터클래스 등을 활발히 진행했고, 소련에서 지휘법 교본, 차이콥스키 교향곡 분석집 등 이론 서적을 집필했다.

2. 2. 1. 초기 경력 (1931-1943)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연주자로 활동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우고 1931년에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를 배웠다.[1] 1934년 졸업 후 모스크바 음악 극장의 부지휘자와 레닌그라드 말리 극장의 지휘자를 차례로 역임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에는 도시 방어선 구축에 참가하기도 했다.[1] 1943년에는 스승인 하이킨의 추천으로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오페라와 발레의 지휘 경험을 쌓았다.[1]

1931년 모스크바 청소년 극장에서 지휘를 시작했으며, 3년 후에는 스타니슬라브스키-네미로비치-단첸코 모스크바 학술 음악 극장에서 활동을 이어갔다.[1]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레닌그라드의 말리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했다.[1]

2. 2. 2. 볼쇼이 극장 시대 (1943-1956)

1943년 스승인 보리스 하이킨의 추천으로 볼쇼이 극장 지휘자가 되어 오페라와 발레 지휘 경험을 쌓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연주는 작곡가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두 사람은 굳건한 우정을 나누었다.[1] 1947년에는 스탈린상을 수상했다.[1]

2. 2. 3. 모스크바 필하모닉 시대 (1960-1975)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콘드라신은 말러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비롯한 대곡들을 주로 다루면서 악단 기량 향상과 단원들의 처우 개선에 힘썼다.[2] 특히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 치하에서 발표를 미뤄왔던 교향곡 4번과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문제작 시집을 가사로 한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의 초연은 소련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2]

1967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부자를 협연자로 모스크바 필과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개최했고, 1975년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완료해 세계 최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소련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서 출반했다. 이외에도 말러의 교향곡 음반들과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버르토크, 베토벤, 차이콥스키, 드뷔시, 라벨 등의 음반들도 제작되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같은 다른 유명한 러시아 음악가들과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 공연을 지휘했다.

그러나 악단 운영과 관리를 둘러싸고 정부 등의 당국자들과 잦은 의견 대립 끝에 1975년에 음악 감독직에서 퇴진했다.

2. 2. 4. 망명 이후 (1978-1981)

1978년 암스테르담에서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바우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하던 중 네덜란드로 망명했다.[3] 망명 후에는 주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면서 콘서트헤바우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라파엘 쿠벨릭의 사임으로 상임 지휘자가 공석이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도 여러 차례 객원 연주회를 가졌다. 이외에도 시카고 교향악단이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NHK 교향악단 등의 연주회에도 객원으로 출연했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에서는 1982년부터 상임 지휘자로 활동할 예정이었으나, 1981년 3월 7일에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대역으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암스테르담 공연을 지휘한 직후 심장 발작으로 타계했다.[3]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KGB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당시 KGB는 암살 시 위장 자살을 사용했기 때문에 KGB의 관여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콘드라신은 1981년 3월 7일, 그의 67세 생일 파티가 열린 날, 말러교향곡 1번을 지휘한 직후 사망했다. 당일 11시에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지배인과 내연의 아내였던 노르다 브뢰크스트라(Nolda Broekstra)의 전 동료로부터 텐슈테트를 대신하여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리허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노르다의 설득으로 결국 수락했다.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단 한 시간의 리허설 후, 오후 4시에 바로 본 공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연 직후 콘드라신은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으며, 축하를 위해 따른 코냑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리허설 후 노르다는 병원에 갈 것을 권했지만, 콘드라신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방에서 푹 쓰러져 식사도 거른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이후 노르다가 다비드 게링가스로부터 온 전화를 대신 받았고, 콘드라신은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겠다고 요청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상을 호소했고, 노르다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하려던 찰나 심장 발작이 일어났다. 듀러 박사의 응급 처치와 로자 파인의 발 마사지에도 불구하고, 오후 11시 구급차 도착 10분 전에 사망했다.

네덜란드에서 콘드라신은 조수이자 통역가였던 음악학자 널다 브로엑스트라(1944년 출생)와 결혼했다. 1975년쯤 처음 만났을 때 브로엑스트라는 30세였고 러시아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둘은 사랑에 빠졌고, 브로엑스트라는 러시아어와 영어를 빠르게 익혔다.

지휘 활동 외에 후진 양성을 위한 세미나나 마스터클래스 등도 활발히 진행했으며, 소련에서는 지휘법 교본이나 차이콥스키 교향곡 분석집 등의 이론 서적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사후 인터뷰 자료 등 사적인 대화록 등을 담은 대담집도 출간되었다.

3. 음악적 특징 및 평가

키릴 콘드라신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지휘로 유명하며, 특히 러시아 음악 해석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지휘는 작품의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감정적인 깊이를 놓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레퍼토리로는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과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20세기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이 있다.

3. 1. 쇼스타코비치 해석

콘드라신은 쇼스타코비치스탈린 치하에서 발표를 미뤄왔던 교향곡 제4번과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집을 가사로 한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를 초연하여 소련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75년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완료해 세계 최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소련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에서 출반했다.

3. 2. 주요 음반

키릴 콘드라신은 멜로디야, 필립스, RCA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소련 시절에는 국영 멜로디야 레이블을 통해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브람스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 발라키레프 (모스크바 필), 말러 (모스크바 필, 레닌그라드 필), 미야스코프스키 (소련 국립 교향악단), 하차투리안 (모스크바 필) 등의 교향곡을 녹음했다.

서방 망명 후에는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등과 함께 라이브 녹음을 남겼다.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 모음곡 '세헤라자데' 녹음이 유명하다.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과의 말러 교향곡은 마지막 연주회 실황으로, 비공식 음반으로 유통되다가 2004년 EMI에서 정규 방송용 테이프를 기반으로 한 CD를 발매했으나, 2011년 11월 현재 절판되었다.

4. 에피소드


  • 볼쇼이 극장 지휘자를 역임한 후, 콘드라신은 주로 콘서트 지휘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여파로 서방에서는 주로 반주 지휘자로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콘드라신은 이러한 소문을 의식하여 해외 공연 때 말러쇼스타코비치 등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을 연주 곡목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 쇼스타코비치와 콘드라신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공연 때 만난 적이 있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직접적인 친분을 쌓았다. 교향곡 제4번과 제13번의 초연도 각각 1961년과 1962년이었다. 이 시기부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이 시작되었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콘드라신은 국내외에서 쇼스타코비치 전문 지휘자 중 한 명으로 부각되었고, 망명 후에도 서방에서 작품 연주와 보급에 힘썼다.

4. 1. 반 클라이번과의 협연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콘드라신은 우승자인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의 지휘를 맡았다. 콩쿠르 이후 그는 클라이번과 함께 미국 투어를 돌았는데, 이는 냉전이 시작된 이후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소련 지휘자였다.[1] 그들은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3번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이 음반은 미국에서 수백만 장이 팔렸으며, RCA 빅터에서 녹음한 차이콥스키 음반은 100만 장을 판매한 최초의 클래식 LP였다.

1972년에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반 클라이번, 콘드라신이 모스크바에서 브람스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회에서 재회했으며, RCA 레코드는 1994년에 이 공연 녹음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스튜디오 녹음을 CD로 발매했다.

4. 2. 정경화와의 협연

정경화는 1979년 전속 음반사인 데카에서 콘드라신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는데, 이는 한국인 연주자가 빈 필과 남긴 최초 녹음이자 소련 출신 지휘자와 협연한 최초 녹음으로 화제가 되었다.[4]

4. 3. 지휘 스타일 변화

콘드라신은 지휘 활동 초기에는 지휘봉을 사용했으나, 모스크바 필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뒤에는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했다. 소련 시절에 낸 지휘법 교본도 맨손 지휘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망명 후에는 다시 지휘봉을 사용해 지휘했다.[3]

5. 수상 경력

연도
1938년전 소련 지휘자 콩쿨 명예상
1947년스탈린 훈장 (오페라 지휘 공로)
1948년스탈린 훈장 (오페라 지휘 공로)
1948년스탈린상 1급 (A.N. 세로프의 오페라 "악의 세력" 볼쇼이 무대 지휘)
1949년스탈린상 2급 (스메타나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 지휘)
1951년RSFSR 공훈 예술가
1960년그래미상
1965년RSFSR 인민 예술가
1969년RSFSR 글린카 국가상 (1966–1967, 1967–1968 콘서트)
1972년소련 인민 예술가
1974년10월 혁명 훈장
1974년국제 말러 협회 말러 금메달
1976년민족 우호 훈장
노동 적기 훈장


참조

[1] 웹사이트 Kirill Kondrashin http://www.allmusic.[...]
[2] 웹사이트 Premiere http://develp.envi.o[...] 2006-02-06
[3] Amazon The Kondrashin Recordings – Shostakovich: Symphony No. 6; Nielsen: Symphony No. 5 https://www.amazon.c[...]
[4] 뉴스 More Russians Send Plea To Nixon on Angela Davis https://www.nytimes.[...] 197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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